'튜링 테스트'의 입장에서 기존에 인간이라 간주되었던 범주를 해체하는 대표적인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튜링테스트의 바탕에 있는 계산주의, 기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고도 허용 가능한 인격적 존재로서 인조인간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고통에 무감각하며 잔인하다.
소설 속의 인간들의 모습도 인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펜필드라는 기계를 통해 기분을 조절하고, 감정이입기를 통해서만 감정이입을 하는 인간의 모습은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를 환기시킨다.( 뒤의 내용에서 좀 더 자세히.) 데커드와 인간인 레쉬와 함께 루바 루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일본의 ‘카라쿠리 닝교(からくり 人形)’ 에도시대에 차를 나르던 장난감 태엽인형. 애완용 로봇이 일본인들에게 유난히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원인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등을 통하여 볼 때, 로봇이야기는 상상력이 20세기 과학과 만나면서 탄생한 하나의 창조신화
인간의 몸에 의한 ‘노동’은 실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면서 인간의 몸은 경제적 생산구조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러한 경제적 구조의 변화는 노동의 성격과 구성에 근본적인 변동을 초래했고, 여가와 소비를 재구성하였다. 이제 노동계급의 젊은
인간인 레쉬와 함께 루바 루프트를 은퇴시키는 장면에서는 냉혹한 성격의 레쉬보다 루바 루프트가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 데커드가 머서가 가짜임이 폭로된 뒤에도 머서와의 융합, 합일을 겪는 대목은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하는 경계선인 감정이입능력이
SF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많은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공장에서는 사용되는 로봇은 SF소설에서 처음 등장하여 현실에서 실제로 사용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로봇이 이렇게 발전하고 널리 사용되는 현상을 어느 한사람의 공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1950년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겉모습을 하고 있는 기계이다. 그러나 사이보그는 사람이다. 비록 기계가 일부 신체기능을 대신해주고 있지만 인간의 두뇌로 판단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지만 안드로이드 역시 협의의 사이보그인 인조인간과 비교해보았을 때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
인간의 끝과 비인간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
지를 점점 더 확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공자궁, 시험관아기, 인공지능과 컴퓨터 문해력
(literacy)은 육체와 정신의 기능들을 외부의 것이 더 이상 외부의 것이 아니며, 내부의 것이
더 이상 단순히 내부의 것이 아니게 되는 정도로까지 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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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기의 대결에서 첫 대국에서 알파고가 승리하자 사람들 중에는 인간을 앞지르는 인공지능의 모습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는가 하면 세기의 대결 4국에서 이세돌 9단이 승리하자 인류를 구한 것 마냥 기뻐하는 사람들도 존재 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나 휴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을 다시 복제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복제란 있을 수 없다. 사진을 찍을 때, 모델의 겉모습은 사진에 그대로 나타나지만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순간의 모델의 진짜 모습을 담은 것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